지금 미국에는 거대한 분노의 물결이
2016년 미 대통령 선거 후보를 뽑는 각 당의 경선에서 예상치 못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민)과 도널드 트럼프 후보(공). 이들의 ‘돌풍’을 계기로, 그 저변에 깔려있는 미국인들의 정서와 민심을 되돌아보는 워싱턴 포스트의 기획특집이 소리없는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에 살아가는 한인으로서 알아야 하는 오늘날의 미국에 대한 이야기다. 워싱턴 중앙일보가 본 기획 시리즈의 원문을 요약 연재한다. 미국에는 분노가 넘쳐난다. 월스트릿에 대해, 무슬림들에 대해, 잘못된 무역협정과 워싱턴 정가를 향해, 무고한 흑인 젊은이를 쏜 경찰들을 향해, 오바마 대통령과 의회의 발목 잡기를 일삼는 공화당을 향해, 정치적 수정론자를 향해, 미시간의 오염 수돗물 사태를 일으킨 위정자들을 향해, 금권정치를 향해, 불법이민자를 향해, 잘 안풀리는 회사생활, 인생의 길을 잃은 절망감을 향해, 구체적이고 혹은 그렇지 않은 각종 분노부터 ‘분노에 대한 분노’까지 오늘날 미국은 온통 분노 투성이다. 대선을 향해 질주하는 각 당의 경선 후보들은 민심의 분노를 수단으로 이용한다. 민심에 가득 찬 분노가 그들의 눈에 띈 것인지, 그들이 이야기하는 갖가지 문구가 대중들에게 분노의 불씨를 옮긴 것인지는 모호하다. 하지만 이 분노로 가득한 민심에, 분노에 편승하는 트럼프와 샌더스 후보의 거대한 약진에 기존의 정치판이 요동치고 있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이제 공화당은 분열됐고 민주당도 분열직전의 상태다. 시간이 갈수록 공화당과 민주당의 이데올로기는 양 극을 향해서 달리며 멀어지고 있다. 올 대선에 첫 투표를 앞둔 젊은이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할 때 초등학생이었다. 그들의 부모는 리차드 닉슨이 퇴임할 당시 갓난아기였던 세대다. 지난 주, 다인종 젊은이들로 구성된 시위대들은 도널드 트럼프 유세에 모인 군중들과 충돌했다. 미국에서 흔치 않은 선거관련 폭력사태가 50년의 시차를 두고 펼쳐졌다. 50년이라는 세월의 격차를 둔 세대들은 이번 대선에서 함께 투표소로 향한다. 지금의 미국을 감싸고 있는 분노의 원인과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실재하는가 아니면 과대포장 된 채 덜 숙성한 망상일 뿐인가?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저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부르짖는 주장들은 새시대를 향한 진정한 외침일까? 하루하루 일상에 충실한 현실속의 국민들의 목소리와 부합하는 것일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이 전국을 누볐다. 공항 격납고에서의 유세부터 고등학교 체육관의 유세까지 가능한 모든 유세 현장을 찾았다. 대학 동아리부터 변두리 시골 로터리 클럽의 아침식사 자리 등 가능한 모든 곳에서 국민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이상주의와 실용주의에 기반한 갖가지 지혜들이 넘쳐났다. 미국에 대한 이상향, 미국민들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인지를 확인 할 수 있었다. 현재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적은 급여 등 각종 경제적인 불안감과 함께,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에 묶인 채 미국이 나아가는 방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반면에 희망에 넘치는 많은 이들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지역사회가 불황을 극복하고, 고질적인 부패에서 벗어나는 모습에 기쁨을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유세장에서 확인되는 모든 ‘분노’의 중심에 도널드 트럼프가 있다. 현대 정치적 함의를 모두 깨부수고, 정치 분석가들의 분석을 날려버리며 거침없는 돌풍을 일으키는 이 남자의 존재는 무엇을 뜻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정치를 혐오한다. 오늘날 스스로 정당 컨벤션에 발걸음 하는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정치적 수정주의와 공화당의 말뿐인 정책에 신물이 난 당원들도 대다수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의 강인함과 시원함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트럼프의 직설적인 화법, 그에게 공격받는 정적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감은 트럼프 지지자들에게는 ‘동기부여’로 직결된다. 트럼프의 유세장에는 그가 전하는 ‘부의 복음’을 좇는 출세지향적인 지지자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분노의 표출’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진 트럼프 유세장은 사실 분노와는 거리가 멀다. 트럼프와 샌더스는 극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라는 양 극단에 존재하지만, 계층의 분노는 도파민 효과를 통해 후보들에 대한 집중력과 충성심을 높이는 공통적인 용도로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1월 말, 뉴햄프셔주 프라이머리를 며칠 앞두고 트럼프 후보의 유세장을 찾았다. 이 곳에서 만난 자원봉사자 세릴 크레이머 여사(70)는 조지 부시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로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다. 하지만 수많은 군인들의 목숨이 잘못된 정보로 시작된 전쟁에 희생됐다는 점에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크레이머 여사는 오바마 대통령도 이 나라를 도덕적, 경제적 나락으로 인도하고 있다고 불만을 표했다. “사람들에게 내가 트럼프 지지자인 것을 말하면 깜짝 놀래죠”라고 말하는 크레이머 여사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기존 정치인들로 구성되어 왔던 역대 정부들이 우리들을 실망시켜 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해요. 지금껏 워싱턴 정치인들이 할 수 있는 방식은 다 해봤잖아요? 이제 다른 방식을 시도해야 합니다”라며 트럼프 지지 이유를 설명했다. 또 다른 트럼프 캠프 자원봉사자 몬티 알렉산더 씨는 38세의 소프트웨어 판매사원으로 전국총기협회 회원이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재임시절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갖고있다. 유세장을 함께 찾은 장인 찰리 트로이(68)씨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는 집을 갖고 싶다면 일을 하면 됐습니다. 6000불 정도 하던 교외주택은 부자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살 수 있었고,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바마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일에 대한 열정보다는 부자들에 대한 투쟁을 강요합니다. 이것은 나라를 두 편으로 갈라 놓는 일입니다. 항상 부자들을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몰아부쳐 가난한 이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잘못된 짓 입니다” 연단에 등장한 트럼프는 오바마 대통령의 30억달러짜리 공군1호기(Air Force One)를 비판하면서 연설을 시작했다. 자신이라면 ‘딜’을 통해 훨씬 싼 가격에 살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한쪽에서 반대시위대들이 구호를 외치자 연단에 있던 트럼프는 “저사람들 끌어내라”고 쏘아 붙인다. 지지자들은 열광한다. 그들은 트럼프의 그런 박력이 미국대통령에게 필요한 ‘강인함’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이긴 적이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 트럼프가 청중에게 묻는다. “우리는 강하면서도 항상 얻어맞는 덩치 큰 아이 같은 존재입니다”라고 스스로 대답한다. “우리는 이 나라를 다시 강하게 만들 겁니다. 그리고 아주 큰 부자가 되지 않고는 위대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유세장을 찾은 이들은 믿는다. 트럼프는 그들을 위한 후보다. 정치인 때가 묻지 않고, 우리들을 다시 ‘부자’로 만들 진정한 리더라고. 경쾌한 음악이 울려퍼지는 유세장을 나와 그들은 만족한 미소로 그들이 타고 온 트럭에 올라 집으로 향한다.